아련한 기호들_재현에 스며든 추상 풍경
김영준(전 부산현대미술관 큐레이터)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는 것에 비견된다. 미술이 자연을 모방한 것에서 시작했다고 해서 훌륭한 미술작품이 그저 ‘모방’이라는 혐의로 폄하되는 것도 아니다. 하기야 어떤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언정 인간에 의한 가공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자연과 예술작품을 어떤 전제도 없이 극단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미술작품에서의 ‘모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방’은 어떤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에 비도덕적인 ‘혐의’가 아니라 유용하고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모방을 미메시스(mimesis)라 했다. 미술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재현’을 이 미메시스 담론으로 합리화 했다. 그 효과는 문학의 다양한 비유법으로 승화되기도 하였다. 직유와 은유는 미술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적용된다. 언젠가 누구에게나 벽지의 얼룩이 마치 어떤 무엇과 닮아 보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착시의 효과는 오랫동안 작가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더 큰 의미로 미술의 모든 작품들은 은유로 환원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마치 할아버지를 닮은 물감 얼룩’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지민 작가의 최근 작품을 감상하면서 스쳐갔던 생각들이다. 원래 그녀의 작품은 힘 있는 갈필의 먹 선이 동적 감성을 불러냈던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작품에는 무엇인가 첨가되었다. 읽어내고 보아야 할 기호들이 많아졌다고 할까? 그런데 ‘재현’으로 은유를 확고히 했던 관성으로 보니 새삼스럽게 직유적 표현이 강한 효과를 보인다고 할까? 그러니까 그녀의 작품 속 재현 기호들이 벽지의 얼룩에서 닮은 어떤 형태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 말이다.
작가 배지민은 동양화가다. 동양화가 가지고 있는 물성과 효과를 거의 다 들이면서도 다양한 소재와 기법으로 자세를 전환한 것 같다. 여전히 갈필의 먹선과 속도감 같은 요소들 역시 제자리에 있다. 많은 채색 실험을 의도하고 있고 셀룰로스(cellulose) 등 다양한 재료들이 접합된다. 그리고 ‘필경 저건 빌딩일 거야!, 저건 마치 도시 풍경처럼 보여’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먹선과 채색, 농담과 여백, 재현과 추상이 서로가 서로를 불러내 부둥켜안고 있다. 대상과 똑같아 보이는 재현을 의도적으로 허물고 근근이 읽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기호들만 남겼다.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인상주의 회화와 비슷한 효과를 가져왔다. 선묘는 윤곽에 대응하지 않고 점묘와 선염(渲染), 먹의 농담과 갈필의 흔적들이 어떤 기호작용을 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거기다가 화선지의 크기 한계는 그녀가 그려내고 표현해내고자 하는 욕망의 범주에 따라가지 못한다. 마치 바로크의 그림처럼 사건의 장면 일부를 잘라내 응시하도록 요구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동양화 전형의 여백을 만들지 못하고 화면을 먹과 색으로 가득 채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배지민의 풍경은 액자형의 그림으로, 추상성에 녹아있는 재현의 흔적과 같은 미술이 되었다. 원래 동양화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선비들의 성찰의 도구로 더 큰 비중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어느 순간 미술이 되었다. 보고, 읽어내고, 반응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지만, 이제 성찰은 어느 곳에서, 어떤 것으로도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배지민의 그림은 어쩌면 무더운 여름날 아스팔트의 열기가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때, 그 너머로 보이는, 이글거리는 도시풍경처럼 무심한 눈요기 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지민의 그림에서 선비의 유교적 성찰이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내면화할 수 있는 성찰의 효과를 본다. 이러한 감성은 그녀의 최근 개인전 현장에서 체험한 것이다.
fläks + flʌks라는 전시 타이틀은 생경하다. Phlox와 Flux의 발음 기호만을 취한 것 같다. 둘 다 플록스 정도로 발음된다. Phlox는 여러 뜻이 있지만, 작가는 붉은 색을 띠는 불꽃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그녀의 그림 속에 이 꽃을 자명하게 재현한 것은 없다. Flux는 어떤 흐름을 나타내는 단어다. 흐름에는 대상이 주어지고 방향과 속도가 전제된다. 또 보이지 않는 동력이 작동될지도 모른다. 작가 배지민은 발음은 비슷하지만 의미가 다른 단어를 결합시키려한다. 이 언어유희는 스스로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 Phlox의 꽃말이 열정, 청춘이라 한다는데, 불꽃이라는 우리말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감성이다.
Flow에서 유래된 Flux는 그녀의 행위를 내면화한다. 먹을 머금은 붓이 특정한 속도로 화선지를 지나갈 때 먹물은 중층의 화선지에 스미며 농담, 속도, 시간, 힘의 작용을 일순간에 드러낸다. 중첩된 한지의 몇 장은 완성될 종이에 매개일 뿐이다. 그녀는 먹과 색의 스밈을 한 겹씩 벗겨내 반복한다. 그녀의 욕망에서 최적의 효과가 나오는 종이가 최종적으로 모든 효과가 정착되는 곳이다. 물을 머금은 유색과 먹은 종이 아래로 스며들고 셀룰로스는 종이 표면 위에 쌓여 정착한다. 수평으로 속도와 운동, 기호들이 있다면, 수직으로는 농담의 깊이와 마티에르의 중첩이 있다.
Phlox의 꽃말이 말하듯 작가는 자신의 기억과 욕망을 꽃 이름에 투사했다. 청춘과 열망 그리고 도시에서의 삶이라는 총체적 정서는 그저 아련하고 추상적인 이미지 화폭으로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재현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은 먹과 색의 얼룩에서 발견할 ‘마치 도시 풍경처럼 보이는, 또는 어떤 풍경이 연상되는’것 같은 비유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사실 숨은 그림처럼 무엇인가를 찾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작가의 작업행위가 시간에 축적된 결과만으로도 좋다. 또한 그것이 동양화라는 구분 속에서 봐야할 전제도 필요 없다. 그것이 추상이든 재현이든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냥 얼룩이어도 좋다. 작가의 열망과 그림 속 감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의미 있는 얼룩과 흔적이 되지 않을까?
